[사람과 법 이야기] `승포판`들을 위한 변명

기사입력 2018-06-15 17:45:58
최종수정 2018-06-15 17:4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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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블랙리스트, 재판거래 등과 같은 생소한 제목의 사법부 현안으로 서초 법조타운은 꽤나 술렁대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 당국이 문제성 법관들에 대한 감독 방안을 검토한 문건이 공개됐는데 이 문서가 또 사람들 입방아거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 문서 내용 중에 매우 생경하기 그지없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승포판(승진을 포기한 판사)'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의 표현에서 바로 읽히듯이, 승진에 대한 동기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당한 직장인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맥이 빠진다.

이들은 아마도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퇴사도 않고 직장에 계속 머물고 있다면 업무에 열정과 충실을 기대하기란 난망이다. 법원행정을 담당한 이 문서의 작성자는 이들 골칫거리 판사들을 법원행정 차원에서 포착·관리하기 위해 출퇴근 기록 등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방안까지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승포판이라든가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이라는 표현이 판사 사회에서 종전부터 널리 쓰여 온 것은 아니다. 이것은 최근의 법원행정 당국자들 사이에서 일부 활용된 신조어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런 표현이 널리 쓰인 것은 아닐지라도 판사 사회에서 소위 '승진'의 문제가 가볍게 여겨진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판사 직업 인생에서 계속 당당하게 긍지를 가진 판사로 남아 있기 위해 한 번은 꼭 넘어야 할 관문이 있었는데,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올라가야 하는 단계가 바로 그것이다.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유하자면 대기업에서 고위 임원이 되거나 군대로 치면 장성 진급을 하는 단계 정도로 이해될 수 있기도 하다. 이 '별'을 달기 위해, 또는 이 '별'을 달지 못해 겪게 되는 애환쯤은 독자들께서도 능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법관이 이 단계 앞에서 감당해야 할 심적 부담의 크기 역시 어렵지 않게 가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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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법원은 논란 끝에 이러한 고법부장 승진제도를 폐지해버렸다. 이 승진제도가 갖는 여러 기능이 있었겠지만 순기능보다 폐해와 부작용이 더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고위직 승진 단계를 없애버린 일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한정된 상급 법원 재판을 맡게 될 사람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승진제도가 없어져 모두가 승포판이 된 모양새 속에서 재판 일에 대한 열정은 또 어떻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지. 이 모든 질문은 향후 법원이 감당할 과제다.

필자는 최근 어느 법관 세미나 자리에 초청돼 "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화두를 놓고 발표한 적이 있다. 과연 판사가 자신의 승진, 출세 때문에 재판 일을 할까. 승진을 위해,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그런 재판만을 일삼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문제다. 이는 자신의 승진과 재판 업무를 맞바꾸는 이해 충돌(conflict of interest)의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그것은 법관윤리강령 위반의 문제로 귀결된다. 재판받는 사람들의 생명, 신체, 재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 막중한 일을 그저 자신의 승진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판사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발상이다.

사법부가 지금 이런저런 문제로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법원의 위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이번 위기 역시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타개와 희망의 빛이 남아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도 재판정에서 혜안을 가진 장인정신의 판사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숙명처럼 묵묵하게 재판 일을 하는 대한민국 판사들이 대다수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근간이 유지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희망은 이들 판사의 '좋은 재판'에서 찾을 일이다.

과연 판사가 승진을 하기 위해 재판을 해 왔는가. 법관 사회는 이 질문에 대해 아니라고 응답하라.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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